성경의 숨은 재밌는 이야기

고린도전서의 숨은 이야기

두 바다 사이의 항구 도시, 출신보다 돈과 성공으로 사람을 재던 벼락부자들의 도시. 분쟁과 소송과 우상 제물 문제로 시끄럽던 교회에 바울은 십자가와 사랑과 부활을 썼습니다. 고린도전서 열여섯 장을 한 구절씩 걸으며 헬라어 단어 속 이야기와 그 시대의 풍경을 함께 만나 봅니다.

16장 437절기록 · 주후 53~55년경 에베소함께 보낸 사람 · 소스데네받는 곳 · 아가야 지방 고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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序

두 바다 사이의 도시

편지를 읽기 전에 먼저 고린도의 거리를 걸어 봅니다

고린도는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잇는 좁은 땅, 이스트모스(지협) 위에 있었습니다. 가장 좁은 곳의 폭이 약 6km에 불과해서, 서쪽 레가이온 항구와 동쪽 겐그레아 항구 사이로 배와 짐이 끊임없이 오갔습니다. 큰 배를 바다로 빙 돌리는 대신, 돌로 포장한 길(디올코스)에 배를 올려 땅 위로 끌어 넘기기도 했습니다. 두 바다의 돈과 사람이 모두 이 도시를 지나갔습니다.

우주에서 본 고린도 지협
국제우주정거장에서 내려다본 고린도 지협. 가운데 가늘게 그어진 선이 1893년에 완공된 고린도 운하입니다. 바울 시대에는 이 좁은 땅을 사이에 두고 두 바다의 항구가 마주 보고 있었습니다.사진: Wikimedia Commons · 촬영자·라이선스 보기 ↗

옛 그리스 도시 고린도는 주전 146년 로마 장군 뭄미우스에게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100년 동안 폐허로 남아 있다가, 주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로마 식민도시로 다시 세웠습니다. 해방 노예와 퇴역 군인, 장사꾼들이 몰려와 살았지요. 바울이 도착했을 때 고린도는 혈통이나 가문보다 돈과 성공으로 신분이 정해지는, 말하자면 "벼락부자들의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 때 이 도시에 와서 1년 6개월을 머물렀습니다(행 18:11). 천막을 만드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와 함께 일하며 복음을 전했지요. 몇 해 뒤 에베소에 머물던 바울은 고린도에서 들려온 소식과 고린도 교회가 보낸 질문 편지(7:1)를 받고 이 편지를 썼습니다.

약 6km고린도 지협의 가장 좁은 폭
1년 6개월바울이 고린도에 머문 기간 (행 18:11)
51–52년갈리오가 아가야 총독이던 때 (델포이 비문)
최소 4통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 수
고린도 레가이온 길 유적
레가이온 항구에서 고린도 시내 광장으로 들어오던 레가이온 길. 바울도 이 돌길을 걸었을 것입니다.사진: Wikimedia Commons · 촬영자·라이선스 보기 ↗
고대 고린도 유적은 오늘날 그리스 코린토스 시 남서쪽에 있습니다. 지도를 넓혀 보면 두 바다 사이에 끼인 좁은 땅과, 그 위를 가르는 운하가 한눈에 보입니다. 구글 지도에서 크게 보기 ↗

고린도에 보낸 편지는 몇 통이었을까?

고린도전서는 사실 "첫 편지"가 아닙니다. 바울은 이 편지 전에 이미 한 번 편지를 보냈습니다(5:9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그 뒤 "많은 눈물로" 쓴 편지도 있었고(고후 2:4), 마지막으로 고린도후서를 보냈습니다. 그러니 적어도 네 통이 오갔고, 그중 두 통은 지금 남아 있지 않습니다. 교회 하나를 두고 이렇게 여러 번 편지를 쓴 것은, 그만큼 문제가 많았고 그만큼 사랑했다는 뜻입니다.

1

십자가의 어리석음

나뉜 교회에 보여 준 한 분 그리스도

1:1

매 맞은 회당장, 형제가 되다

바울은 편지를 "형제 소스데네"와 함께 보냅니다. 사도행전 18:17에는 고린도 회당장 소스데네가 갈리오 총독의 재판석 앞에서 매를 맞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울을 고소했다가 일이 틀어지자 오히려 군중에게 얻어맞은 사람이지요.

만약 같은 사람이라면, 바울을 고발하던 회당장이 몇 해 뒤 바울 곁에서 함께 편지를 쓰는 형제가 된 것입니다. 흔한 이름이라 확정할 수는 없지만, 많은 주석가들이 이 가능성에 주목합니다.

역사
1:2

시민 의회라는 이름의 교회

"교회"(ἐκκλησία 에클레시아)는 원래 그리스 도시에서 시민들이 모여 나랏일을 결정하던 "민회"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에게 에클레시아는 정치 모임의 이름이었지요.

바울은 그 말에 "하나님의"를 붙입니다. 이 모임을 부른 분은 도시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고, 모인 사람들은 노예든 자유인이든 똑같이 "부르심을 받은 성도"입니다.

원어
1:4–7

꾸짖을 교회에 먼저 감사부터

이 교회는 분쟁, 음행, 소송, 성만찬 문제까지 거의 모든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편지를 감사로 시작합니다.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은사에 부족함이 없다고요.

책망보다 감사가 먼저입니다. 바울은 교회의 문제보다 그 교회 안에서 일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보았습니다.

깊은 묵상
1:11

글로에 집 사람들의 제보

바울에게 분쟁 소식을 전한 사람들은 "글로에의 집 편"이었습니다. 글로에는 여성의 이름으로, 일꾼이나 종을 거느리고 에베소와 고린도를 오가며 사업을 하던 집안의 안주인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소문의 출처를 숨기지 않고 밝힙니다. 뒤에서 수군대는 대신 공개적으로 문제를 다루는 방식입니다.

역사
1:12

팬클럽이 된 교회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당시 고린도에서는 유명한 웅변가나 철학 선생을 따르는 제자 무리가 서로 경쟁하는 일이 흔했습니다. 성도들이 그 문화를 그대로 교회로 들여온 것입니다.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언변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행 18:24). 말솜씨로 사람을 평가하던 고린도에서는 아볼로가 인기 스타였을 것입니다. 정작 바울과 아볼로는 서로 경쟁하지 않았습니다(16:12).

문화
1:13

그리스도가 조각날 수 있느냐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의 "나뉘다"(μερίζω 메리조)는 몫을 갈라 나눈다는 말입니다. 교회가 파벌로 갈라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조각내어 각자 한 조각씩 나눠 갖는 일과 같다는 것입니다.

원어
1:14–16

기억이 가물가물한 사도

바울은 자기가 침례를 준 사람으로 그리스보와 가이오를 꼽습니다. 그러다 "스데바나 집 사람들에게도 침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침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고 덧붙입니다. 쓰다가 생각나서 고치는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지요.

그리스보는 원래 회당장이었습니다(행 18:8). 바울이 침례 준 사람을 일부러 세지 않은 까닭은 분명합니다. 누가 침례를 주었느냐가 아니라 누구의 이름으로 받았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깊은 묵상
1:18

"모론"이 된 복음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미련함"(μωρία 모리아)은 영어 "모론(moron)"과 같은 뿌리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구원자는 세상의 눈에 바보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구원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δύναμις 뒤나미스)입니다. 같은 말씀이 누구에게는 바보짓으로, 누구에게는 살리는 능력으로 들립니다.

원어
1:22–23

걸려 넘어지게 하는 덫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십자가는 유대인에게 "거리끼는 것"(σκάνδαλον 스칸달론)이었습니다. 원래 짐승을 잡는 덫에서 미끼를 거는 막대를 가리키던 말로, 영어 "스캔들"의 어원입니다.

신명기 21:23은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고 말합니다. 메시아가 나무에 달렸다는 말은 유대인에게 걸려 넘어지는 덫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덫을 구원의 문으로 바꾸셨습니다.

원어
1:26

돌바닥에 이름을 새긴 사람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고린도 교회는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이었지만 전부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로마서 16:23에는 고린도의 "재무관 에라스도"가 나옵니다.

1929년 고린도 극장 옆 광장에서 라틴어 비문이 새겨진 포장돌이 발견되었습니다. "에라스투스가 조영관직을 맡은 대가로 자기 돈으로 이 길을 포장하다." 성경의 에라스도와 같은 사람인지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갈리지만, 고린도에 실제로 그런 이름의 유력자가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역사
1:28

없는 것들을 택하사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출신과 체면을 따지던 도시에서, 하나님은 일부러 "없는 것들"을 고르셨습니다.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깊은 묵상
1:31

예레미야에게서 빌려 온 자랑법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예레미야 9:24에서 왔습니다. 원래 말씀은 지혜, 용맹, 부를 자랑하지 말고 "나를 아는 것"을 자랑하라는 내용입니다. 고린도 사람들이 자랑하던 바로 그 세 가지입니다.

역사
2

성령이 보여 주신 지혜

말재주가 아니라 십자가로

2:1–2

아덴을 떠나 고린도로

바울은 고린도에 오기 직전 아덴(아테네)에서 철학자들과 논쟁했습니다(행 17장). 그리고 고린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 말합니다.

아덴에서의 경험이 바울의 결심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는 해석도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말 잘하는 사람을 추앙하던 도시에서 바울이 일부러 화려한 말솜씨를 내려놓았다는 사실입니다.

역사
2:3

떨던 사도에게 오신 주님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대사도도 두려웠습니다. 사도행전 18:9–10은 바로 그때 주님이 밤에 환상 가운데 나타나 말씀하셨다고 전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역사
2:4

법정에서 쓰던 "증명"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나타남"(ἀπόδειξις 아포데익시스)은 웅변가와 철학자들이 쓰던 전문 용어로, 논리적으로 빈틈없이 "증명한다"는 뜻이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내 증명은 논리가 아니라 성령이 하신 일이라고요.

원어
2:6–7

"입문자"를 위한 비밀이 아니다

"온전한 자들"(τέλειοι 텔레이오이)과 "비밀"(μυστήριον)은 당시 밀의 종교에서 비밀 의식을 통과한 "입문자"와 그들만 아는 가르침을 가리키던 말입니다. 고린도 근처 엘레우시스의 비밀 의식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유명했습니다.

바울은 같은 말을 쓰면서 그 뜻을 뒤집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돈을 내고 입문한 소수가 아니라, 십자가 앞에 낮아진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다.

문화
2:8

알았더라면 못 박지 않았을 것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빌라도도, 대제사장도, 그 뒤에 선 어둠의 권세도 몰랐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여 이겼다고 생각한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깊은 묵상
2:9

어디서 온 인용일까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바울은 "기록된 바"라고 소개하지만 구약에 똑같은 문장은 없습니다. 이사야 64:4와 65:17을 자유롭게 묶어 인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3세기의 오리겐은 이 구절이 지금은 전하지 않는 "엘리야 묵시록"에서 왔다고 보았습니다. 출처가 어디든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들에게 준비하신 것은 우리 상상보다 크다는 것입니다.

역사
2:14

"영혼만 있는 사람"

"육에 속한 사람"은 헬라어로 ψυχικός 프쉬키코스, 직역하면 "혼에 속한 사람"입니다. 몸만 있는 짐승 같은 사람이 아니라, 생각하고 느끼는 영혼은 있지만 하나님의 영은 없는 사람이지요. 아무리 똑똑해도 성령이 아니면 하나님의 일을 "어리석게"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원어
2:16

그리스도의 마음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는 이사야 40:13 칠십인역의 인용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알 수 없던 하나님의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열렸습니다.

역사
3

하나님의 밭, 하나님의 집

심는 이도 물 주는 이도 아니라 자라게 하시는 분

3:1–2

젖병을 든 사도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지식이 많다고 자부하던 고린도 사람들에게 바울은 "아직 젖먹이"라고 말합니다. 스스로 어른이라 여기던 이들에게는 꽤 아픈 말이었을 것입니다.

신앙의 어른은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시기와 분쟁을 넘어 사랑으로 자란 사람입니다(3:3).

문화
3:6

동사의 시제가 말해 주는 것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헬라어로 "심었다"와 "물을 주었다"는 한 번 하고 끝난 일을 나타내는 시제입니다. 그런데 "자라나게 하셨다"는 계속 이어지는 일을 나타내는 시제입니다.

사람의 수고는 왔다가 지나가지만, 하나님은 그동안에도, 그 뒤에도 쉬지 않고 자라게 하십니다.

원어
3:9

동역자, 밭, 집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한 절 안에서 비유가 농사에서 건축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세 번 나오는 "하나님의"가 핵심입니다. 일꾼도, 밭도, 집도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깊은 묵상
3:10

건축가의 어원

"지혜로운 건축자"는 ἀρχιτέκτων 아르키텍톤, 영어 "아키텍트"의 어원입니다. 직접 벽돌을 쌓는 사람이라기보다 기초를 놓고 공사 전체를 이끄는 우두머리 기술자였습니다. 바울은 기초를 놓았고, 그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3:11).

원어
3:12–13

불에 탄 도시의 기억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고린도 사람들은 불에 탄 도시가 어떤 모습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주전 146년 로마군이 도시를 불태웠을 때 나무와 짚은 사라지고 돌과 금속만 남았습니다.

로마의 대 플리니우스는 그 불길에 녹아내린 금, 은, 구리가 섞여 유명한 "고린도 청동"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대로 믿기는 어려운 전설이지만, 불이 지나간 뒤에 무엇이 남는지는 고린도 사람들이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역사
3:16

성전 중의 성전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헬라어에는 성전을 뜻하는 말이 둘 있습니다. 성전 건물 전체를 가리키는 ἱερόν 히에론과, 신상이 모셔진 가장 안쪽 성소를 가리키는 ναός 나오스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나오스를 씁니다.

"너희"는 복수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이 친히 거하시는 가장 거룩한 방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교회를 파벌로 찢는 것은 성소를 허무는 일입니다(3:17).

원어
3:19

욥의 친구의 말을 인용하다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는 욥기 5:13, 엘리바스의 말입니다. 결국 하나님께 책망받은 친구의 말이지만, 그 안에 담긴 진리 한 조각을 바울은 놓치지 않습니다.

역사
3:21–23

모든 것이 너희 것,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

"나는 바울에게" 하며 한 사람에게 매달리던 성도들에게 바울은 말합니다. 바울도 아볼로도 게바도, 세상도 생명도 사망도 "다 너희의 것"이라고요. 한 사람에게 속하려다 모든 것을 잃지 말고, 그리스도께 속해서 모든 것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깊은 묵상
4

그리스도의 일꾼

세상의 구경거리가 된 사도들

4:1

아랫사람과 청지기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 "일꾼"(ὑπηρέτης 휘페레테스)은 주인의 명을 받아 움직이는 수행원을 말합니다. 흔히 "배 밑에서 노를 젓는 자"에서 왔다고 설명하지만, 그 어원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맡은 자"(οἰκονόμος 오이코노모스)는 주인의 살림을 맡은 청지기입니다. 대개 종이었지만 주인의 재산 전체를 관리했습니다. 청지기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 "충성"입니다(4:2).

원어
4:3–5

고린도 광장 한가운데 선 재판석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고린도 광장 한가운데에는 높은 연단, "베마"(βῆμα)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 재판석 앞에서 갈리오 총독에게 재판을 받았습니다(행 18:12).

바울은 사람의 재판석보다 더 높은 재판석을 바라봅니다. 주께서 오셔서 "마음의 뜻을 나타내실" 때, 그때 각 사람에게 칭찬이 있을 것입니다.

고린도 광장의 베마 유적
고린도 광장의 연단(베마) 유적. 바울이 갈리오 총독 앞에 섰던 재판석으로 여겨지는 곳입니다(행 18:12–17).사진: Wikimedia Commons · 촬영자·라이선스 보기 ↗
역사
4:6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이 구절은 헬라어로도 뜻이 분명하지 않아서 학자들의 의견이 여러 갈래로 나뉩니다. 아이들이 글씨를 배울 때 선을 넘지 않도록 따라 쓰던 연습에서 온 말이라는 해석도 있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만 하라는 당시 격언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바울이 자신과 아볼로를 예로 들어, 성경이 정해 준 선을 넘어 사람을 높이지 말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원어
4:7

아우구스티누스를 바꾼 질문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아우구스티누스는 젊은 시절 믿음의 시작만큼은 사람의 몫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이 구절 앞에서 생각을 바꾸었다고 훗날 고백합니다. 믿음조차 받은 것이라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은혜를 강조한 그의 신학은 이 짧은 질문에서 큰 힘을 얻었습니다.

역사
4:9

원형 경기장의 마지막 순서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끝자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로마 원형 경기장에서는 검투 경기의 맨 마지막 순서로 사형수들을 내보냈습니다. 살아 나갈 수 없는 사람들이었지요.

"구경거리"(θέατρον 테아트론)는 영어 "시어터"의 어원입니다. 고린도 사람들이 스스로 왕처럼 높아질 때(4:8), 사도들은 세상의 무대 맨 끝에서 조롱받고 있었습니다.

문화
4:12–13

세상의 찌꺼기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두 단어(περικάθαρμα, περίψημα)는 그릇을 닦아 낸 구정물이나 문질러 벗겨 낸 때를 가리킵니다. 그리스 도시들에서 재앙을 막으려고 가장 천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쫓아낼 때 그 사람을 부르던 말이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손으로 일하며 모욕을 받으면 축복하고, 박해를 받으면 참고, 비방을 받으면 권면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의 자리는 그렇게 낮았습니다.

원어
4:15

선생은 일만, 아버지는 하나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스승"(παιδαγωγός 파이다고고스)은 주인집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행실을 감독하던 종이었습니다. 영어 "페다고지(교육학)"의 어원이지요.

감독하는 사람은 많아도 아이를 낳은 아버지는 한 명입니다. 바울은 복음으로 그들을 낳은 영적 아버지의 마음으로 이 편지를 씁니다.

문화
4:21

매일까, 사랑일까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선택은 고린도 교회의 몫입니다. 바울은 매를 들 수 있었지만, 먼저 이 긴 편지로 사랑의 길을 열어 줍니다.

깊은 묵상
5

누룩과 유월절 어린 양

교회 안의 죄를 다루는 법

5:1

이방인도 얼굴을 붉힌 일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아마 계모와 함께 산 일로 보입니다. 이것은 구약 율법(레 18:8)뿐 아니라 로마법에서도 금지된 일이었습니다. 로마의 웅변가 키케로는 장모가 사위와 결혼한 일을 두고 "믿을 수 없는 범죄"라며 크게 분노했습니다.

바울이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이라고 말한 것은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교회가 그것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교만하여졌다"는 사실이었습니다(5:2).

문화
5:6–7

유월절 즈음에 쓴 편지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유대인은 유월절이 되면 집 안의 누룩을 샅샅이 찾아 없앴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겠다고 했습니다(16:8). 그래서 이 편지를 유월절 무렵에 썼을 것이라고 보는 학자가 많습니다. 누룩 없는 떡을 먹던 그 절기에, 바울은 교회를 누룩 없는 새 덩어리로 부릅니다.

역사
5:8

날마다 이어지는 절기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동사는 "계속 지키자"라는 뜻의 시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가 누룩 없는 떡을 먹는 긴 유월절입니다.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 대신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요.

깊은 묵상
5:9

사라진 첫 편지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고린도전서보다 먼저 보낸 편지가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그 편지는 지금 남아 있지 않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그 말을 "세상의 모든 음행하는 사람과 아예 만나지 말라"는 뜻으로 오해한 것 같습니다. 바울은 바로잡습니다. 그러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요. 거룩함은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구별되는 것입니다.

역사
5:11

함께 먹지도 말라

고대 세계에서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서로 한 식구로 인정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는 말은 무거운 징계였습니다. 목적은 내쫓는 것이 아니라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5:5).

문화
6

값으로 산 몸

법정과 신전 사이의 성도

6:1

부자에게 유리한 법정

로마의 민사 재판은 돈 있고 지위 높은 사람에게 유리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부자를 고소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고, 재판관에게 뇌물이 오가기도 했습니다. 교회 안의 소송은 대개 힘 있는 성도가 약한 성도를 상대로 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바울은 묻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문화
6:2–3

세상을, 천사를 판단할 사람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사람들이, 지금 동전 몇 푼 때문에 세상 법정에 가서 서로를 고발하고 있었습니다.

깊은 묵상
6:7

차라리 손해를 보라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이기는 것이 전부인 세상에서 바울은 지는 길을 권합니다. 십자가의 길은 내 권리를 내려놓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깊은 묵상
6:11

"이런 자들이 있더니"

9–10절에서 하나님 나라를 받지 못할 사람들의 목록을 말한 뒤, 바울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고린도 교회에는 실제로 그런 과거를 가진 사람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세 동사가 모든 것을 바꿉니다.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셋 다 이미 일어난 일을 말하는 시제입니다. 과거는 사실이지만, 그 과거가 더 이상 그 사람의 이름이 아닙니다.

깊은 묵상
6:12–13

바울이 인용한 고린도의 구호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음식은 배를 위하고 배는 음식을 위하나". 많은 학자들은 이 말들이 고린도 사람들이 내세우던 구호를 바울이 그대로 인용한 것이라고 봅니다. 고대 헬라어 사본에는 따옴표가 없어서 번역할 때 판단해야 하지요.

바울은 구호를 인용한 뒤 곧바로 반박합니다.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것은 아니요… 아무에게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자유를 외치던 사람들이 오히려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원어
6:15–16

아크로고린도의 그림자

고린도 남쪽에는 해발 약 575m의 바위산 아크로고린도가 솟아 있고, 그 꼭대기에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었습니다. 고대 그리스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 시대부터 "고린도 사람처럼 군다"는 말은 음란하게 산다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지리학자 스트라본은 옛 고린도의 아프로디테 신전에 1,000명이 넘는 신전 창기가 있었다고 썼습니다. 다만 이것은 주전 146년 이전의 옛 도시 이야기이고 과장이라는 견해도 많습니다. 그래도 바울 시대 고린도가 성적으로 방종한 항구 도시였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아크로고린도 바위산
고린도 남쪽에 우뚝 솟은 아크로고린도. 꼭대기에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었습니다.사진: Wikimedia Commons · 촬영자·라이선스 보기 ↗
역사
6:19

내 몸이 지성소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3:16에서 교회 공동체를 가리켰던 "성전"(ναός)이 이번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몸을 가리킵니다. 신전 창기를 찾아가는 몸이 바로 성령께서 사시는 성소였습니다.

원어
6:20

노예 시장의 영수증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사다"(ἀγοράζω 아고라조)는 시장(아고라)에서 물건이나 노예를 사들이는 말입니다. 노예가 새 주인에게 팔리면 그 몸은 이제 새 주인의 것이었습니다.

우리를 사신 값은 그리스도의 생명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결론짓습니다.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문화
7

부르심 받은 그대로

결혼과 독신, 종과 자유인에게

7:1

"이제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7장부터 편지의 흐름이 바뀝니다. "~에 대하여"(περὶ δέ 페리 데)라는 말이 7:1, 7:25, 8:1, 12:1, 16:1, 16:12에 반복해서 나옵니다. 고린도 교회가 보낸 질문 편지에 바울이 하나씩 답하는 표시로 보는 학자가 많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도 고린도 사람들이 편지에 쓴 구호를 인용한 것이라는 해석이 많습니다. 바울은 그 말을 받아 균형을 잡아 줍니다.

원어
7:3–4

남편의 몸은 아내의 것

"남편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며". 아내의 몸이 남편의 것이라는 말은 당시 누구나 아는 상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반대도 똑같이 말합니다. 남편의 몸도 아내의 것이라고요. 고대 세계에서는 매우 놀라운 균형이었습니다.

문화
7:10–11

"나가 아니요 주시라"

"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바울은 예수님이 이혼에 대해 하신 말씀(막 10:9–12)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자기 의견과 분명히 구분합니다(7:12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복음서가 기록되기 전부터 교회가 예수님의 말씀을 소중히 전하고 있었다는 귀한 증거입니다.

역사
7:18

할례 자국을 지우려던 사람들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헬라 세계의 운동장(김나지움)에서는 벌거벗고 운동을 했기 때문에, 할례 받은 유대인은 조롱거리가 되기 쉬웠습니다.

그래서 수술로 할례 흔적을 감추려는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마카베오상 1:15에도 그런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몸의 표시를 바꾸려 애쓰지 말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라고요.

역사
7:21–23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느냐

고린도 같은 도시에서는 인구의 상당수가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로마에서는 주인이 노예를 풀어 주는 일도 흔했고, 노예 스스로 돈을 모아 자유를 사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사회적 신분이 무엇이든, 그리스도인의 진짜 주인은 한 분뿐입니다.

로마 시대 노예 목걸이
로마 시대 노예의 청동 목걸이. 도망친 노예를 잡으면 주인에게 돌려보내 달라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바울은 종을 “주께 속한 자유인”이라고 불렀습니다.사진: Wikimedia Commons · 촬영자·라이선스 보기 ↗
문화
7:26

"임박한 환난"

바울은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지금은 그대로 지내는 것이 좋다고 조언합니다. 이 환난이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주님 재림 전의 고난으로 보기도 하고, 50년대 초 지중해 여러 곳을 덮친 기근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역사
7:29

돛을 접듯이 줄어든 시간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단축하다"(συστέλλω 쉬스텔로)는 넓게 펼쳐진 것을 끌어당겨 좁히거나 접는다는 말입니다. 돛을 거두어 접는 모습에도 쓰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뒤로 역사는 마지막 때를 향해 접혀 들어가고 있습니다.

원어
7:31

무대 배경이 바뀌듯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외형"(σχῆμα 스케마)은 겉모습, 모양새를 말합니다. 연극 무대의 배경이 장면마다 바뀌는 모습에 견주어 설명하는 주석가들도 있습니다. 결혼도, 슬픔도, 기쁨도, 사고파는 일도 지나가는 무대 장치입니다. 영원한 것은 주님뿐입니다.

원어
7:39–40

"주 안에서만"

남편이 죽은 아내는 "자기 뜻대로 시집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고대 세계에서 과부는 대개 집안의 결정에 따라 재혼했습니다. 바울은 그 결정권을 여성 자신에게 돌려주면서, 단 하나의 조건을 붙입니다. 주 안에서.

깊은 묵상
8

지식과 사랑

우상 제물 앞에서 형제를 보다

8:1

부풀리는 지식, 세우는 사랑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교만하게 하다"(φυσιόω 퓌시오오)는 풀무로 바람을 불어넣어 부풀린다는 말입니다. 고린도전서에 여섯 번이나 나오는데, 신약의 다른 곳에는 골로새서에 딱 한 번 나올 뿐입니다.

"덕을 세우다"(οἰκοδομέω 오이코도메오)는 집을 짓는다는 말입니다. 지식은 풍선처럼 부풀지만 속이 비어 있고, 사랑은 벽돌 한 장씩 집을 쌓아 올립니다.

원어
8:4–6

쉐마를 둘로 나누다

유대인은 날마다 "들으라 이스라엘아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신 6:4)라고 암송했습니다. 바울은 이 고백을 이렇게 풀어 씁니다.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칠십인역에서 "여호와"는 "주(퀴리오스)"로 번역되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의 가장 거룩한 고백 안에 예수님을 "한 주"로 모셔 넣은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믿었는지 보여 주는 놀라운 구절입니다.

깊은 묵상
8:10

신전 식당으로 온 초대장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고대 신전에는 제사를 드린 뒤 고기를 나눠 먹는 식당이 딸려 있었습니다. 고린도의 아스클레피오스 신전 유적에서도 긴 의자를 놓았던 식당 방들이 발굴되었습니다.

이집트에서 발견된 파피루스에는 이런 초대장이 남아 있습니다. "카이레몬이 당신을 내일 세라피스 신전의 주의 식탁에 초대합니다." 생일잔치도, 결혼 축하도 신전 식당에서 열리던 시대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사회생활을 하려면 피하기 어려운 문제였지요.

고린도에서 나온 제사 장면 목판화
고린도에서 출토된 주전 6세기 목판 그림. 제단으로 양을 끌고 가는 제사 행렬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바친 고기가 신전 식당과 시장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사진: Wikimedia Commons · 촬영자·라이선스 보기 ↗
역사
8:11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내 지식이 옳아도, 그 지식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목숨을 내주신 형제가 넘어진다면 그 지식은 사랑을 잃은 것입니다.

깊은 묵상
8:13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바울은 강한 자의 편에 서서 이론적으로는 그들이 옳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결론은 이렇습니다.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옳은 것보다 큰 것이 사랑입니다.

깊은 묵상
9

썩지 아니할 관

권리를 내려놓은 사도와 이스트미아 경기

9:1

질문으로 쏟아 내는 변론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9장 처음 몇 절은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당시 연설가들이 청중을 끌어들일 때 쓰던 방식이지요. 바울은 사도의 권리를 다 가지고 있음을 먼저 보여 준 뒤, 그것을 쓰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문화
9:5

아내와 함께 다닌 베드로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베드로는 결혼한 사람이었습니다(막 1:30 "시몬의 장모"). 그리고 아내와 함께 선교 여행을 다녔다는 것을 이 구절이 알려 줍니다. 예수님의 형제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역사
9:9–10

소를 위한 말씀일까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신 25:4). 소가 일하면서 곡식 몇 입 집어먹는 것을 막지 말라는 율법입니다. 바울은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

물론 하나님은 소도 돌보십니다. 바울의 말은 이 율법이 결국 일하는 사람을 위한 원리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사람이 그 복음으로 먹고사는 것은 마땅하다는 것이지요.

깊은 묵상
9:12–15

천막 짓는 사도

그런데 바울은 그 권리를 쓰지 않았습니다. 고린도에서 그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함께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며 생활비를 벌었습니다(행 18:3). 당시 순회 철학자들은 강연료를 받거나 부자의 후원을 받아 살았습니다. 후원을 받으면 그 부자에게 매이게 되었지요.

바울은 복음이 "값없이" 전해지는 것을 자기 "자랑"으로 삼았습니다.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기 위해, 그리고 복음이 돈 문제로 오해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역사
9:19–22

여러 모습이 된 사람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바울은 다섯 번이나 "같이 된 것은"을 반복합니다. 사람을 내 쪽으로 끌어오는 대신, 내가 그 사람의 자리로 내려가는 것이 바울의 전도 방법이었습니다.

깊은 묵상
9:24–25

시들어 버리는 셀러리 관

고린도 근처 이스트미아에서는 2년마다 이스트미아 경기가 열렸습니다. 올림피아 경기 다음가는 큰 대회였고, 고린도가 주관했습니다. 우승자에게는 금메달이 아니라 풀잎으로 엮은 관을 씌워 주었습니다. 시대에 따라 소나무 가지나 말린 셀러리(야생 파슬리)로 만들었지요.

며칠만 지나면 시들어 버리는 관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바울이 고린도에 머물던 51년 봄에도 이 경기가 열렸을 것으로 보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이스트미아 유적
고린도 동쪽 이스트미아의 포세이돈 성역 유적. 2년마다 이곳에서 이스트미아 경기가 열렸습니다.사진: Wikimedia Commons · 촬영자·라이선스 보기 ↗
역사
9:26

달리기와 권투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경기장에는 출발선에 줄을 걸어 두었다가 한꺼번에 내리는 출발 장치가 있었습니다. 선수들은 정해진 결승점을 향해 달렸습니다. 허공을 친다는 것은 상대 없이 혼자 주먹을 휘두르는 연습, 또는 상대를 맞히지 못하는 헛손질을 말합니다.

네메아 경기장의 출발 장치
네메아 경기장에 남은 달리기 출발선. 돌에 홈을 파서 출발 장치를 세웠습니다. 바울이 말한 “달음질”이 시작되던 자리입니다.사진: Wikimedia Commons · 촬영자·라이선스 보기 ↗
문화
9:27

눈 밑을 때리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치다"(ὑπωπιάζω 휘포피아조)는 원래 권투 용어로 "눈 밑을 때리다", 곧 눈두덩이를 퍼렇게 멍들게 한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상대로 권투를 합니다.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서입니다.

원어
10

광야의 거울

이스라엘의 이야기로 오늘을 비추다

10:1–2

바다에서 받은 침례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다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받고". 바울은 출애굽 사건을 침례의 그림으로 읽습니다. 물을 지나 옛 주인 바로에게서 벗어나 새 지도자에게 속한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깊은 묵상
10:4

따라다니는 반석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유대 전승에는 광야에서 물을 낸 반석이 이스라엘을 따라 굴러다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위경 『성경 고대사』, 토세프타 등).

바울이 이 전승을 알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요점은 분명합니다. 광야에서 그들과 함께하며 생수를 주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역사
10:8

2만 3천일까, 2만 4천일까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민수기 25:9에는 바알브올 사건으로 "이만 사천 명"이 죽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차이를 두고 여러 설명이 있습니다. 바울이 "하루에" 죽은 사람만 셌다는 설명, 민수기 26장의 다른 숫자와 섞였다는 설명, 바울이 기억에 의존해 대략 말했다는 설명 등입니다.

역사
10:11

본보기가 된 이야기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본보기"(τύπος 튀포스)는 도장을 찍어 남긴 자국, 틀을 말합니다. 영어 "타입"의 어원이지요. 광야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오래된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말세를 만난 우리"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원어
10:13

골짜기의 출구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피할 길"(ἔκβασις 엑바시스)은 "밖으로 나가는 길"입니다. 군대가 골짜기에 갇혔을 때 빠져나갈 산길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시험을 허락하실 때 출구도 함께 만드십니다.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의 크기를 정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이 구절의 위로입니다.

원어
10:16

유월절의 세 번째 잔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유대인의 유월절 식사에서 세 번째 잔은 "축복의 잔"이라고 불렸습니다. 식사 뒤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마시는 잔이지요.

예수님이 "저녁 먹은 후에" 잔을 들어 새 언약을 말씀하신 것(눅 22:20)이 바로 이 잔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학자가 많습니다.

역사
10:21

두 개의 식탁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식탁"(τράπεζα 트라페자)은 신전에서 제물을 차려 놓던 상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였습니다.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지만(8:4), 그 뒤에서 예배를 가로채는 영적 세력은 실제로 있습니다.

문화
10:25

시장의 고기는 묻지 말고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시장"(μάκελλον 마켈론)은 라틴어 "마켈룸"을 그대로 빌려 쓴 말로, 고기와 생선을 파는 상설 시장이었습니다. 고린도에서도 "마켈룸"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라틴어 비문이 발견되었습니다.

신전에서 제사에 쓰고 남은 고기가 이 시장으로 흘러나오는 일이 흔했습니다. 바울은 일일이 출처를 캐묻지 말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26절입니다.

폼페이의 고기 시장 유적
폼페이의 마켈룸(식료품 시장) 유적. 고린도의 시장도 이처럼 가운데 마당을 두고 가게들이 둘러선 모습이었을 것입니다.사진: Wikimedia Commons · 촬영자·라이선스 보기 ↗
문화
10:26

식탁에서 드리던 감사의 시

"이는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시 24:1). 유대 전통은 음식을 먹기 전에 이 시편 말씀을 근거로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시장 고기도 결국 하나님이 지으신 것입니다.

역사
10:31

먹든지 마시든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긴 우상 제물 논쟁의 결론이 이 한 줄입니다. 신앙은 예배당에서만이 아니라 저녁 식탁에서도 드러납니다.

깊은 묵상
11

주의 만찬

머리 수건과 나뉜 식탁

11:1

나를 본받으라는 용기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이 말은 교만이 아니라 투명함입니다. 바울은 "나를 보라"고 말하기 전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을 먼저 붙입니다.

깊은 묵상
11:4–5

머리를 가리고 제사 드린 로마 사람들

로마 남자들은 신에게 제사를 드릴 때 토가 자락을 끌어올려 머리를 덮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도 대제사장으로서 머리를 가린 모습의 조각상을 남겼지요. 반면 여성에게 머리 수건은 결혼한 여인의 정숙함과 체면을 나타내는 표시였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이 관습들이 뒤섞여 혼란이 생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핵심은 예배 자리에서 문화적 질서를 함부로 깨뜨려 다른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단락은 신약에서 해석하기 가장 어려운 본문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대제사장 모습의 아우구스투스 상
대제사장(폰티펙스 막시무스) 차림의 아우구스투스 황제. 제사 드릴 때처럼 토가로 머리를 덮고 있습니다.사진: Wikimedia Commons · 촬영자·라이선스 보기 ↗
문화
11:10

"천사들로 말미암아"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왜 천사가 나오는지 확실히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배 때 천사들이 함께 있다고 믿었던 유대 전통과 연결하는 해석이 많습니다. 바울은 바로 다음 구절에서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며 균형을 잡습니다.

원어
11:20–21

먼저 먹고 취한 사람들

초대교회는 부유한 성도의 집에서 모여 함께 식사하며 주의 만찬을 나눴습니다. 로마식 저택의 식당(트리클리니움)에는 보통 아홉 명 남짓 기대어 누울 자리밖에 없었습니다. 나머지는 마당에 앉아야 했지요.

일을 마치고 늦게 온 노예와 가난한 성도들이 왔을 때는 이미 음식이 바닥나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주의 만찬이 부자와 가난한 자를 가르는 자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런 상황 재구성은 고고학 발굴을 토대로 한 학자들의 추정입니다.

폼페이 연회 벽화
폼페이 “트리클리니움의 집”에서 나온 연회 벽화(1세기). 손님들이 긴 의자에 기대어 먹고 마시고, 종들이 시중을 듭니다.사진: Wikimedia Commons · 촬영자·라이선스 보기 ↗
문화
11:23

가장 오래된 성만찬 기록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받았다"(παρέλαβον)와 "전했다"(παρέδωκα)는 유대 랍비들이 스승에게 받은 가르침을 제자에게 그대로 넘겨줄 때 쓰던 짝말입니다.

고린도전서는 50년대 중반에 쓰였으니, 대부분의 학자들이 복음서보다 앞선다고 봅니다. 그래서 23–25절은 지금 남아 있는 기록 가운데 가장 오래된 성만찬 기록입니다.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라는 말이 겨우 20여 년 뒤에 쓰인 것입니다.

역사
11:24–25

"나를 기념하라"

"기념"(ἀνάμνησις 아남네시스)은 단순히 옛일을 떠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이 유월절을 지킬 때 출애굽을 "오늘 우리 일"로 다시 살아 내듯, 십자가 사건을 지금 이 자리에서 새롭게 붙드는 것입니다.

원어
11:26

오실 때까지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성만찬은 과거(죽으심)와 현재(먹고 마심)와 미래(오실 때까지)를 한 식탁에 모읍니다.

깊은 묵상
11:29

몸을 분별한다는 것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여기서 "몸"은 떡 자체만이 아니라 함께 식탁에 앉은 그리스도의 몸, 곧 교회 공동체를 함께 가리킨다고 보는 해석이 많습니다. 굶주린 형제를 무시한 채 받는 성찬은 주님의 몸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깊은 묵상
12

한 몸, 많은 지체

은사는 자랑이 아니라 섬김을 위해

12:2–3

"예수는 주시라"는 위험한 고백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예수는 주시라"(퀴리오스 예수스)는 초대교회의 가장 오래된 신앙고백 가운데 하나입니다(롬 10:9).

로마 세계에서 "주"는 황제를 부르는 칭호이기도 했습니다. 155년경 서머나의 폴리갑 감독은 "가이사는 주시라"고 한 번만 말하면 살려 주겠다는 회유를 받았지만 끝내 거절하고 순교했습니다.

역사
12:4–6

같은 성령, 같은 주, 같은 하나님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은사의 다양함을 말하는 자리에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차례로 나옵니다. 교회의 하나 됨은 삼위 하나님의 하나 되심에 뿌리를 둡니다.

깊은 묵상
12:7

모두의 유익을 위하여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유익"(συμφέρον 쉼페론)은 "함께 가져오다"에서 나온 말로, 공동의 이익을 뜻합니다. 은사는 나를 빛내는 장식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공구입니다.

원어
12:12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의 손과 발

고린도에는 치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이곳 유적에서 흙으로 빚은 손, 발, 다리, 눈, 귀 같은 신체 모형이 무더기로 발굴되었습니다. 병이 나은 사람들이 감사의 표시로 바친 것들이지요.

고린도 성도들은 몸에서 떨어져 나와 신전 바닥에 쌓인 손과 발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라는 바울의 말이 더 생생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바울이 이 유물을 염두에 두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지만, 이것은 추정입니다.

역사
12:13

한 성령을 마시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고린도 교회를 갈라놓던 출신과 신분의 벽이, 같은 성령을 마신 사람들 사이에서 무너집니다.

깊은 묵상
12:21–22

배와 손발 우화를 뒤집다

로마에는 유명한 우화가 있었습니다. 주전 494년 평민들이 귀족에게 반발해 도시를 떠나자, 메네니우스 아그리파가 "몸의 지체들이 배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다 같이 굶어 죽을 뻔했다"는 이야기로 그들을 달랬다는 것입니다(리비우스 『로마사』 2권).

그 우화의 교훈은 "아랫사람은 제자리를 지켜라"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같은 몸 비유로 정반대를 말합니다.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약한 사람을 더 귀하게 여기는 몸, 그것이 교회입니다.

역사
12:23–24

덜 귀한 지체에 더 귀한 옷을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는 남에게 보이기 부끄러운 부분일수록 옷으로 더 정성껏 가립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바로 그렇게 더 큰 존귀를 입히십니다.

깊은 묵상
12:28

키를 잡는 사람

"다스리는 것"(κυβέρνησις 퀴베르네시스)은 배의 키를 잡고 방향을 잡는 조타수의 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영어 "거번(govern)"과 "사이버네틱스"가 여기서 나왔습니다. 교회의 리더십은 군림이 아니라 폭풍 속에서 배가 침몰하지 않도록 키를 붙드는 일입니다.

원어
13

사랑의 노래

가장 좋은 길

13:1

울리는 꽹과리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고린도는 청동으로 유명한 도시였습니다. 고린도 청동 그릇은 로마 부자들이 탐내던 사치품이었지요.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는 그리스 극장에서 소리를 울려 퍼지게 하려고 청동 항아리를 객석 밑에 놓았다고 기록합니다. 바울의 "소리 나는 구리"가 이것을 떠올리게 한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속이 텅 빈 채 울리기만 하는 소리, 사랑 없는 은사가 그렇습니다.

문화
13:3

한 글자 차이, "불사르게"와 "자랑하려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그런데 가장 오래된 사본들(P46, 시내 사본, 바티칸 사본)에는 "자랑하려고 내줄지라도"로 되어 있습니다. 헬라어로 "불사르다"(καυθήσομαι)와 "자랑하다"(καυχήσωμαι)는 글자 하나 차이입니다.

어느 쪽이든 뜻은 통합니다. 순교처럼 보이는 가장 큰 희생도 사랑 없이 하면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원어
13:4–7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우리말로는 "~하며"로 이어지지만, 헬라어 원문에서 4–7절의 사랑에 대한 묘사는 열다섯 개가 모두 동사입니다. 사랑이 어떤 상태라기보다 계속 행동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 단락의 "사랑" 자리에 "예수님"을 넣어 읽어 보라고 권합니다. "예수님은 오래 참으시고, 예수님은 온유하시며…" 완벽하게 들어맞습니다. 이 사랑을 끝까지 보여 주신 분이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원어
13:5

장부를 덮는 사랑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생각하다"(λογίζομαι 로기조마이)는 장부에 기록하고 계산한다는 회계 용어입니다. 사랑은 상대의 잘못을 장부에 꼬박꼬박 적어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신"(고후 5:19) 것과 같은 단어입니다.

원어
13:8

떨어지지 않는 사랑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떨어지다"(πίπτω 핍토)는 꽃잎이 지듯, 건물이 무너지듯 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예언도, 방언도, 지식도 언젠가 그칩니다. 그러나 사랑은 영원 속으로 그대로 가지고 들어가는 유일한 것입니다.

원어
13:12

청동 거울과 수수께끼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당시 거울은 유리가 아니라 청동을 반들반들하게 닦아 만든 것이었습니다. 고린도는 청동 세공으로 이름난 도시였지요. 아무리 닦아도 비친 얼굴이 흐릿했습니다.

"희미하나"를 직역하면 "수수께끼(αἴνιγμα 아이니그마) 속에서"입니다. 민수기 12:8 칠십인역에서 하나님은 모세와는 "수수께끼로 하지 않고 대면하여" 말한다고 하셨는데, 바로 그 단어입니다. 지금은 수수께끼처럼 보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입니다.

고대 청동 거울
주후 150년경의 청동 거울(아테네 케라메이코스 박물관). 바울 시대 사람들이 들여다보던 거울은 이처럼 금속을 닦아 만든 것이었습니다.사진: Wikimedia Commons · 촬영자·라이선스 보기 ↗
원어
13:13

셋 중의 제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믿음은 볼 때 끝나고, 소망은 이루어질 때 끝납니다. 그러나 사랑은 하나님을 뵙는 그날에도 계속됩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요일 4:8).

깊은 묵상
14

알아듣는 말로

질서 있는 예배

14:2–4

나를 세우는 말, 교회를 세우는 말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바울은 방언을 막지 않습니다(14:39). 다만 예배 자리에서는 모두가 알아듣고 함께 세워지는 말이 먼저라고 말합니다.

깊은 묵상
14:7–8

피리와 나팔

"혹 저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여기서 "저"는 그리스의 관악기 아울로스, "거문고"는 키타라입니다. 음정이 분명하지 않으면 무슨 곡인지 알 수 없지요.

"만일 나팔(σάλπιγξ 살핑크스)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군대는 나팔 소리로 진격과 후퇴를 알았습니다. 애매한 나팔 소리는 군대를 위험에 빠뜨립니다.

아울로스 연주자가 그려진 그리스 도자기
아울로스(피리)를 부는 사람이 그려진 그리스 도자기(루브르 박물관). 바울이 말한 “저”가 바로 이 악기입니다.사진: Wikimedia Commons · 촬영자·라이선스 보기 ↗
문화
14:16

"아멘"을 하지 못하는 사람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예배 때 기도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은 회당에서 이어받은 전통이었습니다. "알지 못하는 자"(ἰδιώτης 이디오테스)는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 문외한을 뜻하는데, 영어 "이디엇"의 어원입니다.

처음 온 사람이 "아멘" 할 수 없는 예배라면 무언가 잘못된 것입니다.

원어
14:19

다섯 마디와 일만 마디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일만"(μύριοι 뮈리오이)은 헬라어에서 가장 큰 숫자 단위였고, 영어 "미리어드(무수히 많은)"의 어원입니다. 알아듣는 다섯 마디가 알아듣지 못하는 무수한 말보다 낫습니다.

원어
14:24–25

이사야가 말한 고백

처음 온 사람이 예언을 듣고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면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 이사야 45:14에서 이방 민족들이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과연 네 가운데 계시고"라고 고백하는 장면이 메아리칩니다. 좋은 예배는 하나님이 그 자리에 계심을 손님이 먼저 알아보게 합니다.

역사
14:33

혼란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창세기 1장에서 혼돈 위에 질서를 세우신 하나님은 예배 가운데서도 그렇게 일하십니다.

깊은 묵상
14:40

군대의 대열처럼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질서"(τάξις 탁시스)는 군대가 대열을 맞춰 서는 것을 말합니다. "품위 있게"(εὐσχημόνως)는 보기에 아름답고 단정하게라는 뜻입니다. 성령의 자유와 아름다운 질서는 서로 싸우지 않습니다.

원어
15

부활

첫 열매가 되신 그리스도

15:3–5

가장 오래된 신앙고백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시고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11:23처럼 "받았다, 전했다"는 짝말이 다시 나옵니다. 바울이 회심 직후 받은 고백을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 고백이 예수님의 부활 뒤 불과 몇 해 안에 만들어졌다고 봅니다. 부활은 오랜 세월에 걸쳐 부풀려진 전설이 아니라, 처음부터 교회가 붙든 고백이었습니다.

역사
15:6

"지금까지 대다수가 살아 있으나"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바울의 말은 이런 뜻입니다. "못 믿겠으면 가서 직접 물어보라. 증인들이 아직 살아 있다."

역사
15:7

형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는 예수님 생전에 그를 믿지 않았습니다(요 7:5). 그런데 그가 나중에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갈 2:9). 무엇이 그를 바꿨는지 바울은 이 한 줄로 알려 줍니다. 부활하신 형님을 만난 것입니다.

역사
15:8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ἔκτρωμα 엑트로마)는 달을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아이, 또는 유산된 태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울의 반대자들이 그를 깎아내리며 부르던 별명이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바울은 그 모욕적인 말을 스스로 받아들이며 은혜를 고백합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15:10).

원어
15:20

안식 후 첫날의 첫 열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첫 열매"(ἀπαρχή 아파르케)는 추수의 시작을 알리며 하나님께 처음 드리는 곡식 단입니다.

레위기 23:10–11은 이 첫 이삭 한 단을 "안식일 이튿날" 흔들어 드리라고 합니다. 유월절 기간의 안식일 다음 날, 바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간의 첫날입니다. 첫 열매가 드려졌으니 이제 큰 추수가 뒤따릅니다.

역사
15:29

죽은 자를 위하여 침례를 받는다?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침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신약에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로 꼽힙니다.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이 수십 가지나 된다고 합니다.

바울은 이런 관습을 가르치거나 칭찬하지 않습니다. 고린도의 어떤 사람들이 하던 일을 예로 들어, 부활이 없다면 그런 일조차 의미가 없다고 지적할 뿐입니다.

원어
15:32

에베소에서 맹수와 싸웠다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로마 시민은 원칙적으로 맹수형에 처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말은 실제 경기장 싸움이라기보다 짐승처럼 달려드는 적대자들과의 싸움을 비유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이어지는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는 이사야 22:13의 인용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남는 것은 그렇게 사는 길뿐이라는 것이지요.

에베소 대극장
에베소 대극장. 이 편지를 쓰던 무렵 바울은 에베소에 있었고, 얼마 뒤 이 극장에서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소동이 일어납니다(행 19장).사진: Wikimedia Commons · 촬영자·라이선스 보기 ↗
역사
15:33

희극 대사를 인용한 사도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이 말은 주전 4세기 그리스 희극 작가 메난드로스의 작품 『타이스』에 나오는 대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누구나 아는 속담처럼 쓰였지요. 바울은 세상의 격언도 진리를 담고 있으면 거리낌 없이 가져다 썼습니다.

역사
15:36–38

씨앗의 부활

"네가 뿌리는 씨는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뿐이로되". 밀알과 밀 이삭은 같으면서도 다릅니다. 부활의 몸도 지금 몸과 이어져 있으면서도 영광스럽게 다를 것입니다.

예수님도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요 12:24) 하시며 같은 그림으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셨습니다.

깊은 묵상
15:45

첫 아담과 마지막 아담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창세기 2:7 칠십인역의 인용입니다. 첫 아담은 하나님이 불어넣으신 숨으로 산 영혼이 되었고,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이들을 살리는 분이 되셨습니다.

깊은 묵상
15:51–52

쪼갤 수 없는 순간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순식간에"(ἐν ἀτόμῳ 엔 아토모)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순간에"라는 뜻입니다. 영어 "아톰(원자)"이 바로 이 말에서 왔습니다.

"홀연히"는 직역하면 "눈 깜빡할 사이에"입니다. 마지막 나팔이 울리는 그날, 부활은 그렇게 빠르고 확실하게 일어날 것입니다. 헨델은 『메시아』에서 이 구절을 "나팔이 울리리라"라는 웅장한 아리아로 만들었습니다.

원어
15:55

전갈의 침, 소몰이 막대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호세아 13:14를 인용한 승리의 노래입니다. "쏘는 것"(κέντρον 켄트론)은 전갈의 독침, 또는 소를 몰 때 찌르던 뾰족한 막대를 말합니다(행 26:14 "가시채").

사망의 독침은 죄였습니다. 그런데 그 독침이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 박혀 독이 빠졌습니다. 침이 빠진 전갈은 더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원어
15:58

헛되지 않은 수고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부활에 관한 긴 장의 결론은 하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의 수고입니다. 부활이 있기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오늘의 섬김도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깊은 묵상
16

사랑으로 맺는 편지

헌금과 여행 계획, 그리고 마라나타

16:1–2

매주 첫날의 헌금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헌금입니다. 이 구절은 사도행전 20:7과 함께, 초대교회가 "매주 첫날", 곧 주님이 부활하신 날에 모였다는 것을 보여 주는 가장 이른 증거 가운데 하나입니다.

"수입에 따라"는 정해진 액수가 아니라 받은 은혜와 형편에 맞게 드리라는 뜻입니다.

역사
16:3

돈을 맡길 사람은 너희가 정하라

"너희가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게 하리니". 바울은 헌금을 직접 들고 가지 않고 교회가 뽑은 대표에게 맡기겠다고 합니다. 돈 문제에서 의심받을 일을 처음부터 만들지 않으려는 지혜입니다(고후 8:20–21).

문화
16:8–9

열린 문과 많은 대적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려 함은 내게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으나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라". 이 편지를 쓴 곳이 에베소라는 증거입니다. 열린 문과 많은 대적이 한 문장에 나란히 있습니다. 복음의 문이 크게 열릴 때 반대도 함께 커집니다.

역사
16:10–11

디모데를 업신여기지 말라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그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멸시하지 말고". 젊고 소심했던 디모데가 거친 고린도 교회에 가는 길을 바울은 아버지처럼 걱정합니다.

깊은 묵상
16:12

아볼로의 거절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내가 그에게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많이 권하였으되 지금은 갈 뜻이 전혀 없으나". 고린도에서 "나는 아볼로파"라는 말까지 나오던 상황이었습니다. 아볼로가 가기를 꺼린 것은 그 분쟁에 기름을 붓지 않으려는 배려였을 것입니다. 바울과 아볼로는 경쟁자가 아니라 동역자였습니다.

역사
16:13

"남자답게"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남자답게"(ἀνδρίζεσθε 안드리제스테)는 군인들에게 "용기를 내라"고 외칠 때 쓰던 말입니다. 그리고 곧바로 덧붙입니다.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16:14). 용기와 사랑이 짝을 이룹니다.

원어
16:17

"행운이"와 "아가야 사람"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온 것을 기뻐하노니". 브드나도(포르투나투스)는 라틴어로 "행운이", 아가이고는 "아가야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이름은 노예나 해방 노예에게 흔히 붙여졌습니다.

그렇다면 고린도에서 바울에게 온 대표단에는 집주인 스데바나와 함께 그 집 종이나 해방 노예들이 나란히 있었을지 모릅니다. 교회 안에서는 그들 모두가 "알아줄" 형제였습니다(16:18).

역사
16:19

집에 있는 교회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많이 문안하고". 고린도에서 바울과 함께 천막을 만들던 부부가 이제 에베소에서 자기 집을 교회로 열었습니다. 초대교회의 교회 건물은 대부분 이런 가정집이었습니다.

깊은 묵상
16:21

친필 사인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바울은 대개 편지를 불러 주고 서기가 받아 적게 했습니다(롬 16:22). 그리고 마지막 몇 줄은 직접 써서 진짜 자기 편지임을 보증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앞부분과 다른 바울의 글씨체를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문화
16:22

헬라어 편지 속 아람어 한마디

"마라나 타". 헬라어 편지 한가운데 갑자기 예수님의 모국어인 아람어가 나옵니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2세기 초 교회 문서 『디다케』에도 성찬 기도 끝에 이 말이 나옵니다(10:6).

헬라 교회가 이 아람어를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썼다는 것은, 예루살렘의 첫 성도들이 부르던 기도가 그대로 전해졌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우리 주"라 부르며 다시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원어
16:24

마지막 단어는 사랑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할지어다". 바울은 그 어떤 편지보다 고린도 교회를 날카롭게 꾸짖었습니다. 그런데 편지의 마지막 인사는 "나의 사랑"입니다. 바울의 다른 편지에는 이런 끝인사가 없습니다. 13장의 사랑을 바울은 자기 편지로 직접 보여 줍니다.

깊은 묵상
後

그 후의 고린도

편지가 도착한 다음 이야기

이 편지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습니다. 바울은 고린도를 "근심 가운데" 다시 방문했고(고후 2:1), 눈물로 또 편지를 썼습니다(고후 2:4). 그리고 마침내 고린도후서에서 화해의 기쁨을 노래합니다. 로마서를 쓴 곳도 고린도였습니다. 바울은 세 번째 전도여행 끝에 이 교회에서 석 달을 머물며 로마서를 불러 주었습니다.

약 40년 뒤인 90년대 중반, 로마 교회의 클레멘스가 고린도 교회에 긴 편지를 보냅니다. 젊은 사람들이 장로들을 몰아내는 분쟁이 또 일어났던 것입니다. 클레멘스는 이렇게 씁니다. "복된 사도 바울의 편지를 다시 손에 들라. 그가 처음 복음을 전할 때 무엇이라고 썼는가? 그는 성령의 감동으로 자신과 게바와 아볼로에 대해 썼다. 그때에도 너희가 편을 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클레멘스1서』 47장). 고린도전서는 첫 세대가 지나고도 여전히 그 교회를 다시 하나로 부르는 편지였습니다.

고린도 아폴론 신전 유적
고대 고린도의 아폴론 신전 유적. 주전 6세기에 세워진 이 신전의 기둥 일곱 개가 지금도 서 있습니다. 바울이 걸었던 도시는 폐허가 되었지만, 그 도시에 보낸 편지는 지금도 전 세계 교회에서 읽힙니다.사진: Wikimedia Commons · 촬영자·라이선스 보기 ↗
파피루스 46 사본
바울 서신을 담은 가장 오래된 사본 가운데 하나인 파피루스 46(주후 200년 전후로 추정). 고린도전서도 이 사본 안에 들어 있습니다.사진: Wikimedia Commons · 촬영자·라이선스 보기 ↗

문제 많은 교회에 보낸 가장 아름다운 노래

고린도전서는 분쟁, 음행, 소송, 우상 제물, 성만찬, 은사, 부활 논쟁까지 교회가 겪을 수 있는 거의 모든 문제를 다룹니다. 그런데 그 한가운데에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13장)와 가장 힘찬 부활의 선언(15장)이 놓여 있습니다. 문제 많은 교회일수록 더 필요한 것이 사랑이고, 그 모든 수고를 헛되지 않게 하는 것이 부활입니다.